9편과 10편을 통해 전남 해남의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와 전북 고창의 첨단 스마트 물류센터가 어떻게 광주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완벽하게 보조하는지 입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전력, 용수, 부품 공급망까지 지도 위에 완벽한 청사진이 그려졌지만, 현실에서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첫 삽을 뜨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가장 거대하고 단단한 장벽을 먼저 넘어야 합니다. 바로 정부의 '행정 절차'와 '규제'라는 법적 관문입니다.
정부와 대기업이 아무리 수백 조 원의 투지를 공언해도, 대한민국 법이 정한 행정 절차를 제때 통과하지 못하면 착공식은 수년 뒤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직면한 가장 현실적인 당면 과제인 예비타당성 조사(예타) 면제의 가능성과, 덩치 큰 행정 규제들이 가진 현실적 장벽을 냉정하게 분석해 보겠습니다.
1. 시간과의 싸움, '예비타당성 조사(예타) 면제'가 사활인 이유
반도체 산업은 국가 간 속도전입니다. 대만의 TSMC나 미국의 인텔 등 글로벌 경쟁사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공장 건설 기간을 극단적으로 단축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국책 사업이나 산단 조성 추진 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바로 예비타당성 조사입니다. 이 사업이 정말 경제성이 있는지, 세금을 쓸 가치가 있는지 검증하는 제도입니다.
취지는 좋지만 문제는 '시간'입니다. 통상적인 예타는 기획부터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최소 1년에서 길게는 2년 이상 소요됩니다.
내가 만약 글로벌 시장의 수요 급증에 맞춰 신제품을 적기에 출시해야 하는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라면, 부지도 확정되었고 자금도 준비되었는데 나라의 서류 심사를 기다리느라 2년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상황에 극심한 답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2년 뒤면 이미 경쟁사들이 시장을 선점한 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이번 호남 클러스터를 가동하기 위해 국가재정법상 '국가 정책적 추진 사업'으로 지정하여 예타 자체를 면제하거나, 상반기 중 조기 완료하는 패스트트랙을 적용해 주느냐가 속도전의 첫 번째 성패를 가를 것입니다.
2.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환경영향평가와 군사시설 해제 규제
예타를 넘어서면 더 까다로운 '환경영향평가'와 '지자체 인허가'의 늪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도체 공장은 화학 물질을 대규모로 다루고 앞선 편에서 다루었듯이 하루 수십만 톤의 정화된 폐수를 방류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근 생태계나 하천에 미치는 영향을 검증하는 환경영향평가는 통상 수많은 보완 요구와 주민 공청회를 거치며 사업을 장기화시키는 주범으로 꼽힙니다.
여기에 광주 반도체 클러스터만의 독특한 난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부지 자체가 '군 공항'이라는 특수 군사 시설이라는 점입니다.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에 묶여 있는 이 땅을 산업단지로 전용하기 위해서는 국방부와의 고도의 행정 협의와 군사시설 보호구역 해제 절차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정부 부처 간의 이른바 '밥그릇 싸움'이나 행정적 칸막이 때문에 서류가 한 부처의 책상 위에서 수개월 동안 멈춰 서 있는 일은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대통령실 차원의 강력한 컨트롤타워가 가동되어 국방부, 환경부, 국토교통부, 그리고 지자체의 도장을 한 번에 찍어주는 '통합 심의제'가 전면 도입되지 않는 한, 법적 규제의 실타래를 푸는 것 자체가 거대한 모험이 될 수 있습니다.
3. 지방 산단 잔혹사를 넘기 위한 현실적 대안
우리는 과거 많은 정권에서 대규모 지방 산단 조성을 발표했다가 수년 동안 서류 작업만 하다 정권이 바뀌면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지방 산단 잔혹사'를 수없이 목격해 왔습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이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히 대기업의 투자 금액만 홍보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규제 샌드박스'와 '특별법' 제정이 강력하게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우도 초기 용수 관로 인허가 문제로 인근 지자체 간의 갈등이 생겨 사업이 2년 가까이 지연된 뼈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호남권은 광주와 전남, 전북 등 여러 지자체의 행정 구역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만큼, 이를 통합 관리하고 인허가를 원스톱으로 처리할 수 있는 '서남권 첨단산업 특별법' 같은 초법적 행정 지원 체계가 국회와 정부 주도로 신속하게 통과되어야 합니다. 행정 규제를 깨부수는 과단성 있는 결단만이 800조 원이라는 거대한 자본을 호남의 땅속으로 빠르게 스며들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신속한 착공을 위해서는 통상 1~2년이 소요되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조기에 면제하거나 패스트트랙을 적용하는 행정적 결단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대규모 폐수 방류에 따른 까다로운 환경영향평가와, 군 공항 부지가 가진 군사시설 보호구역 해제 등 부처 간 복잡한 규제 얽힘을 풀기 위한 통합 심의 시스템 구축이 시급합니다.
과거 지방 산단들이 인허가 지연으로 표류했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자체 간 갈던을 중재하고 인허가를 원스톱 처리할 특별법 제정 등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입니다.
행정적 규제를 극복하는 국내적 과제 외에도, 대기업들의 투자를 가로막는 무서운 대외적 변수가 국경 너머에서 도사리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미·중 반도체 전쟁과 미국 정부의 자국 투자 압박 속에서 호남의 800조 원 투자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12편: 대외적 변수 점검 - 미국 정부의 대미 투자 압박과 호남 800조 투자의 상관관계'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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